언론보도

[조선일보] (역사 속 숨은 영웅)_일생을 독립군에 바쳤던 '가려진 장군' 최운산

관리자

2021.11.12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대한 역사 서술에서 '최운산'이라는 이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최운산은 봉오동 전투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던 최진동의 동생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최운산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인적·물적 토대를 쌓았고, 독립군에게 무기와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군 활동에 일생을 바쳤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 뒤에는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 형제가 있었고, 그중에도 최운산의 역할이 컸다.


[만주벌 봉오동 승리 뒤에는 최운산이 있었다]




※  최운산,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





- 부산 여섯 배 면적의 땅 소유했던 거부(巨富)


최운산은 1885년 11월 7일 중국 옌지(연길·延吉)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이다. 삼 형제의 둘째인 그는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강력한 무력투쟁만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 믿고 1908년 청의 군대에 들어갔다. 최진동은 청나라 지방 군대의 고급간부가 됐고, 최운산은 지방 군대의 보위단 간부를 지냈다. 동생도 보위단 간부로 근무했다.


최운산은 중국어에 능통했고 고위 관료 친구도 많았다. 중국이 토지 정리를 할 무렵 그는 몇 개 군()에 이르는 벌판을 헐값에 불하받았다. 개간 작업을 거친 황무지는 값이 폭등했고 최운산은 갑부 지주가 되었다. 축산, 미곡, 무역에 주류, 제면, 성냥, 비누 공장까지 운영하는 간도 제1의 거부가 되었다.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는 "함께 투쟁했던 어르신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 땅이 부산 면적의 여섯 배였다"고 했다.



- "만주 거치는 모든 독립운동가를 환대하고 지원했다"


무술과 총술에 능한 최운산은 간도 지역 중국 군관으로 근무했다. 마적*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군사학교를 열고 사병(私兵)도 조직했다. 1915년에 그 사병 숫자가 500명에 달했다. 자위부대 이름은 도독부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효되고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무대를 만주로 옮겼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부모와 형제를 포함해 최 씨 일가가 모두 당시 황무지였던 봉오동으로 이주해, 모은 재산으로 신한촌(新韓村)이라는 마을을 건설했다. 봉오동을 독립운동가들의 기지로 택한 것이다. 옌볜대 민족력사연구소 김춘선 교수는 "(최 씨 형제는) 만주를 경유하는 모든 독립운동가를 환대하고 지원했다."고 말했다.


* 마적: 청나라 말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걸쳐서 화베이(華北) ·둥베이(東北) 지역에 할거한 기마집단.






- 전 재산 투입해 봉오동 산중에 투쟁기지 건설


봉오동에 독립군 기지가 완성된 해가 1915년이다. 3·1운동이 터지고 도독부는 군무도독부로 확대됐다. 최운산은 형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최운산 자신은 참모장을 맡아 재정과 행정을 책임지며 군사정보 수집 및 전투에도 참여했다. 최운산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운산 이외에 명길, 문무, 만익, 풍, 빈, 고려 등 모두 7개의 이름을 사용해 가며 무기구입과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봉오동 전투 시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입수해 매복 작전을 짠 것도 최운산의 첩보에 근거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 푼의 찬조금 없이 최운산의 사재로 장비, 피복, 식량을 조달했다. 대포 6문, 장총 500정, 권총 수십 정, 실탄 수만 발, 수류탄 수백 개…"



- 홍범도, 김좌진 등 만주 무장투쟁세력 모아 연합 독립군 조직


무기는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서 구입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독립군, 그러니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최 씨 형제의 군무도독부를 통합한 조직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였다. 형 최진동이 그 총사령관 격인 '부장(府長)'이었고(그런데 봉오동에 있는 기념탑에는 홍범도가 사령으로, 최진동이 부사령으로 기록돼 있다.) 군수물자 구입과 기지 건설, 식량 구매 비용은 모두 최운산이 댔다. '부산 여섯 배에 달하는' 토지를 팔았고 공장을 매각했다.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갑자기 봉오동에 연합사령부가 생긴 게 아니다. 최진동, 최운산 같은 물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홍범도·최운산·최진동(최운산의 형)·김좌진 장군



-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1920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있는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했다. 일본군 1개 소대가 이들을 추격하자 독립군은 즉각 퇴각했다. 두만강을 넘어 추적해오는 일본군에게 또 다른 독립군 부대가 일격을 가하고 즉각 퇴각했다. 함북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이 1개 대대를 보내 독립군 사령부가 있는 봉오동까지 진격했다.



3면이 산으로 싸인 고산 분지 봉오동에서 일본군은 매복해 있던 독립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교전 결과는 공식 기록상 아군 전사자 3명,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 10명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맞붙은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였다. 4개월 뒤 연합 세력이 주 활동지로 복귀하면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붙은 전투가 청산리 전투였다. 이 또한 만주 무장투쟁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로 기록된다.


봉오동을 본영으로 하는 독립군 이름은 북로독군부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간도국민회군과 최진동-최운산의 군무도독부군이 연합한 부대였다. 1군사령관은 홍범도, 독군부 부장 즉 연합사령관은 최운산의 형 최진동이었다.



[조선일보 창간 직후 항일독립군 활동 자세히 보도]






- 우리가 모르던 이름, 최진동 · 최운산


만주 내 무장세력 통합에 성공한 최운산은 국내 진공 작전을 간헐적으로 벌이며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봉오동 지리는 누구보다 익숙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맞붙은 한일 정규군 전투는 북로독군부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런데 우리는 최진동, 최운산을 모른다. 심지어 봉오동 현지 기념비에도 홍범도 휘하에 최진동이 활동했다고 새겨져 있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은 간도 지역 독립군 박멸 작전에 돌입했다.(간도참변)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따르면 3,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끔찍한 방식으로 학살됐다. 이후 간도 무장 세력은 러시아로 대거 옮겨갔고 사회주의 혁명군에 동참해 투쟁을 이어갔다. 최운산은 여러 차례 투옥과 고문을 겪었고, 재산의 대부분을 군자금으로 소진해 거의 남지 않았다. 1945년 7월 5일 광복 40일 전, 그는 평양에 피신해 있던 아들 봉우의 집에서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별세했다.







- 친일파 낙인, 인정받지 못한 공적(功績)


1945년 일본이 패주하고,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문화혁명기, 이미 죽은 형 최진동에게 친일파 낙인이 찍혔다. 지주라는 출신 성분이 문제였고, 일본에 당시 돈 100원이 안 되는 헌금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윤경로는 "그가 한 행적에 비하면 흠결 사유가 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가족들은 생존을 위해 최진동의 묘를 파묘하고 유골을 개울가에 파묻었다. 소련 빨치산부대에서 활동했던 홍범도가 현지에서 총사령관으로 기록된 이유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1980년대 초에야 무덤은 복구됐다.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는 이후 총무처에 남편의 공적을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1961년 1월 건국훈장을 준다는 연락을 받고 아들과 함께 상경했다. 그러나 당시 서훈 업무를 맡았던 총무처 직원이 뒷돈을 요구했고, 이에 격분한 아들 봉우가 주먹을 날려 서훈이 취소됐다.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건국훈장을 받던 1963년, 형 최진동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동생 최운산이 다시 서훈된 것은 1977년이다.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운동에서 옌볜(연변·延邊)에 살고 있던 최운산의 후손들과 한국에 와 있던 최봉우가 극적으로 만났다. 최봉우의 딸 최성주는 "사가(史家)들이 사실을 바로잡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봉오동을 답사하고 옛사람들, 옌볜 학자들을 만나 우리가 우리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고 했다. (최운산은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 최운산, 전 생()을 바친 애국(愛國) ※






※ 최운산, 후대의 이야기 ※



- 봉오동대첩 기념비 ·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 중국 지린성 투먼시 봉오동에 있는 봉오동전투 전적비. 저수지 입구 안쪽에 있다. 한글과 한문이 병기된 기념탑 뒤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다. 사람들은 봉오동 승리의 주역 홍범도와 최진동을 상징한다고 한다.


중국 지린성 투먼시 봉오동에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鳳梧溝反日戰迹地)'이라 적힌 봉오동대첩 기념비가 있다.



▲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중국 지린성 허룽현 삼도구 청산리에 있는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에는 매년 수만 명이 참배한다.



['청산리대첩 기념비' 中 허룽시서 제막]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창립식


최운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2016년 7월 설립됐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망국의 처절한 시기에 숭고한 민족애를 바탕으로 한 최운산 장군의 자기희생과 활동이 극히 일부만 알려져 있다"며 "우선 최 장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더 찾아 연구하고 재조명하는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참고=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독립기념관



오현영 뉴스큐레이션팀 





출처: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08/20170308012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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