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스포츠 한국] 승전기념일 제정하면 어떨까

관리자

2021.11.02

산리는 만주 화룡현 삼도구에 있는데,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사는 용정촌에서 약 100여 리 떨어져 있다. 주위가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첩산이므로 우리 교포들이청산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부근에는 충신장(忠信場)이라는 중국인 마을이 있고, 충신장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큰 바위가 있다고 하여 대립자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15리쯤 가면 백운평이 있다.



일제는 1920년 10월 2일 마적의 수령 장강호(長江好)를 매수하여 마적 400여 명으로 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케 하였다. 이 습격으로 시부아 경부의 가족 등 일본인 9명이 살해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삼아 일본영사관 보호와 마적토벌이라는 구실 아래 나남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제19사단의 병력을 출동시켜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봉오동 참패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간도출병의 명분을 위한 처사였다.  



 이 사건으로 훈춘에서만 조선인 교포 240여 명이 학살되고, 한인회와 독립단 조직이 파괴되었다. 또 일제의 반공개적인 만주지역 교포학살이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일제가 간도에 파병한 병력은 각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여 명 규모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임무는 한국독립군을 학살하는 일이었다.  


당시 청산리와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대한독립군(약 300명), 국민회군(약 250명), 대한신민단(약 200명), 의군부(약 60명), 의민단(약 100명), 한민회단(약 200명) 등 모두 1200여 명에 이르렀다. 5개 부대 대표들은 10월 13일 이도구 복합마당에서 대표자회의를 열고,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하나의 독립군연합부대를 편성하며, 군사행동을 통일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하기로 군사통일과 함께 전략을 짰다.


22일 오전 7시 20분 어랑촌에 본부를 설치한 일본군 아즈마 소좌는 주력부대인 예비대를 남완투구로, 그리고 21일 남양촌에 숙영하고 있던 아미노 부대를 북완루구로 각각 출동시켜 양측으로 홍범도 부대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나 천리봉에 지휘부를 설치한 홍범도는 일본군의 음모를 미리 간파하고 독립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널푼골 남쪽과 북쪽 골짜기에 매복시킨 채 일본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남북 양측의 최전선에서 일본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립군은 계획했던 작전대로 양측의 일본군을 향해 동시에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서서히 널푼골로 퇴각하는 척하다가 천리봉 남쪽 기슭으로 신속히 빠져나갔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양측에서 협공해오던 일본군은 널푼골에 들어서자 서로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오인하고 저희들끼리 한바탕 총격전을 벌였다. 


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던 일본군은 오히려 홍범도의 탁월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결국 자멸전을 벌이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 연합부대는 일본군 약 400여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어랑촌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참패하였다. 기병연대장을 비롯하여 400여 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가 1000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청산리 대첩은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정리하면 ①백운평 전투 ②완루루 전투 ③천수평 전투 ④어량촌 전투 ⑤맹개골 전투 ⑥쉬구전투 ⑦만기구 전투 ⑧천보산 전투 ⑨고동하 골짜기 전투 등이다. 독립군은 10전 10승을 이루었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26일 새벽까지 꼬박 6일 동안 밤낮으로 추위와 기아 속에서 전개되었다. 봉오동전투 때와는 달리 날씨는 맑은 편이었으나, 이 지역 10월 하순은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이는 등 대단히 추운 계절이다.


봉오동과 청산리대첩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국치 10년 만에 최초의 항일전에서 승리한 전승이었다. 국난ㆍ국치ㆍ국망의 과정에서 수많은 의열ㆍ의병투쟁이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 또는 소수에 의한 자기희생적인 투쟁이다. 그런데 봉오동 전투는 800명, 청산리전투의 경우 5개 연합부대 1200명의 독립군이 참전하였다.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강제해산된 후 최대 규모의 독립군이 편성되고,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이었다.


둘째, 1919년 3ㆍ1혁명이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작전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진압된 후 국내의 의혈청년들이 국경을 넘고, 오래 전부터 만주일대에서 무장전쟁을 준비해온 독립군 지도자들과 힘을 모아 항일전쟁을 치렀다. 그런 의미에서 3ㆍ1혁명의 연장전이다. 


셋째,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승만의 비현실적인 외교노선에 빠져 있을 때, 만주지역 우리 독립군의 무장전쟁은 임시정부의 노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후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에 이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게 되었다. 


넷째, 1876년 불평등 강화도조약 이래 일방적으로 당해온 일제의 침략과 만행 그리고 수탈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한민족이 봉오동ㆍ청산리대첩으로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이후 일제패망 때까지 국내외에서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있는 상무정신의 모태가 되었다. 


다섯째, 일제는 우리 독립군을 전투력이 없는 오합지졸로 얕보았다가 두 차례나 패전을 겪는 수모를 당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최신무기로 무장한 정예 제19 사단 병력을 주축으로 각 사단에서 차출하여 2만 5000 명 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했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이후 일제는 한국독립군을 두려워하였다. 


여섯째,  우리 독립군은 오래 전부터 본격적인 항일전에 대비하여 최운산 형제 등의 노력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중이던 체코군단으로부터 기관총 등 현대식 무기를 구입하여 국치 이래 최초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군관들로부터 현대식 군사훈련을 받고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운동 단체들은 하나같이 무장독립운동을 목표로 삼았고  군사훈련과 신식무기 구입을 서둘렀다. 


일곱째, 청산리전쟁은 각지에 산재해 있던 독립군 부대가 대표자회의를 열어 홍범도 장군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하나의 독립군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일제와 싸워 승리하였다.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는 이후 중국 관내 독립운동가들의 유일당운동과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신간회운동으로 나타났다. 


여덟째,두 전투의 승리는 중국정부와 인민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봉오동ㆍ청산리 전쟁에서 패배한 후 보복으로 경신참변을 일으켜 간도지역 한인마을을 습격, 극히 제한된 통계를 통해서도 살해된 한인이 3700여 명, 불탄 가옥이 3300여 채에 이르렀다. 이같은 만행은 국내외 동포들의 대일 증오심과 독립정신을 불러왔다. 


일제강점기 1920년대 초반 그야말로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세계적인 최강 육군 제9사단 병력을 상대로, 그것도 산 설고 물 설은 이역 만주에서 우리 독립군은 지극히 어려운 여건에서 왜적과 싸우고 통쾌하게 승전고를 울렸다. 우리가 일제와 싸워서 이기기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처음이며, 멀리는 1597년 이순신장군이 12척의 남은 배로 133척의 왜군을 명량해협에서 물리친 이후 323년 만의 쾌거였다. 그야말로 청사에 빛나는 봉오동과 청산리승전이었다. 


봉오동ㆍ청산리대첩을 기리는 ‘승전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으면 한다.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따르면 국가기념일은 역사적인 평가와 정부의 의지가 있으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선언하면 된다.




김삼웅 논설고문 ysk@dailysportshankook.com




출처: http://www.dailysportshankoo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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