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연변 도태 최우삼 묘소에 비석을 세우다 1

관리자

2020.12.30

| 고향 봉오동에서 4대를 잇다.



봉오동 첫 방문에서 증조부 최우삼의 산소를 찾은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2015년 봉오동을 지키고 살던 초면의 6촌 오빠 부부는 1997년 봉오동을 찾으셨던 아버지의 약속을 전해주었다.


고향을 떠난 지 53년 만에 처음으로 봉오동을 찾아 그곳에 사는 후손들도 몰랐던 증조부 묘의 위치를 알려주셨던 아버지는 곧 돌아와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겠다고 조카부부와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셨고 신부전증으로 2년여 투석치료 끝에 2001년 돌아가셨다.


손자인 아버지는 조부 최우삼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평생 잊지 않으셨다. 조선말기 간도에서 연변 도태道台로 봉직하면서 청나라에 저항해 조선 주민들의 삶을 돌보던 민족주의자 최우삼의 삶을 기리고자 하셨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최운산 장군의 삶도 훌륭했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런 아들들의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던 연변 도태 최우삼의 영웅적 삶에 대해서도 증손인 우리들이 잘 이해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연변 도태 최우삼 묘소를 처음 찾았을 때



봉오동에서 증조부의 묘를 확인한 우리 5남매는 연변 도태 최우삼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기로 마음을 모았다. 증조부가 돌아가신 1925년 당시는 큰아들 최진동 장군과 작은아들 최운산 장군이 북만과 연해주를 넘나들며 독립전쟁을 이어가다 두 아들이 모두 감옥에 갇혀 있던 때라 일부러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 뒤에 세 그루의 흑송(검은 소나무)을 심었다. 아버지는 “그 산에는 소나무가 별로 없는 산이라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의 묘소에만 일부러 흑송을 심어 표식이 되게 한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 흑송이 백년 가까이 자라 증손자들 앞에 그 모습을 우뚝 드러냈을 때, 일제강점기와 공산화된 중국의 문화혁명기를 거치며 이산의 아픔을 처절하게 겪어야 했던 우리 집안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의 감동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비석을 세우기로 결정하기는 쉬웠으나 중국 땅에 증조부의 비석을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연변의 비석공장은 대부분이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었고 한국식 비석을 만든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대한민국의 첫 시기를 살다가신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에 비의 상단이 동글동글한 구름 문양인 중국식 비석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묘소 주위의 풀을 걷어내자 커다란 산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방법을 찾아보다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한국에서 원하는 모양의 비석을 만들어 중국으로 운반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먼저 비문을 만들었다. 원로 언론인 박래부 선생님이 초안을 잡아주시고 역사학자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연변 도태 최우삼의 비문을 완성했다.


비문을 한국의 석재공장에 보내 비석을 주문하고 운반방법을 확인하던 중 한글이 새겨진 돌은 중국 통관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법을 바꿔야 했다. 조선식 갓비석의 설계도면을 구해 다시 연변을 찾았다.


연길과 도문 주변의 여러 석재공장들을 며칠 돌아다니 끝에야 사진과 설계도면을 보고 갓비석을 만들 수 있다는 곳을 발견했다. 마침 봉오동에서 가까운 도문이라 더 반가웠다. 그런데 외형은 만들 수 있게 되었으나 중국인 석공에게 한글로 된 비문을 맡길 수가 없었다.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국에 돌아와 갓비석 설계도면을 만들어준 석제공장에 다시 부탁했다. 그들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수익을 떠나 의미가 있는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중국으로 고무판에 비문을 새겨 보내기로 했다. 한글을 모르는 중국인 석공을 위해 비석에 고무판을 대고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를 새길 수 있도록 실제 비석과 같은 크기의 고무판에 비문을 파서 중국으로 보냈다. 매번 현지에 갈 수 없어 몇 달 간 전화와 이메일, SNS로 작업을 진행한 탓인지 단 한 순간도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확인해보니 큰소리치던 도문의 석공이 조선식 비석 제작이 어려워 목단강 근처의 전문 석재공장에 재의뢰했고, 고무판까지 만들어서 보냈던 한글 비문은 자신이 하기엔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이었다.


곧 마무리가 될 것을 기대하고 제막식을 일정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유능한 석공이 있는 곳으로 돌을 보내거나 석공을 불러야 했다. 결국 최고 전문가라는 석공을 도문으로 초빙해 작업을 맡겼다.


며칠 간 애를 태우는 기다림 끝에 우리 형제들이 도문으로 가서 그와 함께 마지막 수정 작업을 했다. 시작부터 비석이 완성될 때까지 매순간 긴장의 연속이었다. 정말 힘들게 비석이 완성되었다.


연변 도태 진산 최공 우삼 지 묘전주이씨 부인


어렵게 비석이 완성하고 나니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석을 산으로 옮기는 일은 인부들이 돌을 지고 가거나 비석을 포클레인에 담아 옮기기로 했었는데 비석이 크고 무거워 인부들이 지고 옮기기 힘드니 크레인으로 운반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레인이 올라가기엔 산길이 너무 좁았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버텼다. 정말 난감했지만 비석을 다 만들어 놓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결국 산길을 넓히기로 했다. 봉오동 수남촌의 라철룡 촌장이 도와주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넓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여러 작업을 하며 며칠을 지내는 동안 비가 와서 땅을 말리느라 또 사흘을 더 지체해야 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비석을 세우기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의 비용과 시간이 들었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비석을 세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매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함께 보고 욕심을 버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기도하고 기다렸다.


간도에서 조선인들의 안위와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에 중국식 비석을 세워드릴 수 없다고 판단한 때부터 단 한 순간도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변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함께 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치며 한길을 걸으셨던 최운산 장군의 삶을 생각했고 증조부 최우삼의 애국적 삶을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되고자 했다.


준비부터 제막식까지 꼬박 1년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우리 형제들의 마음을 보시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 매순간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해결책이 나타났다.


정말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10월 9일에 봉오동 증조부 최우삼 묘소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제막식에는 큰아들인 최진동 장군의 외손자 부부와 둘째아들 최운산 장군의 손자인 우리 5남매, 그리고 연길에 살고 있던 셋째 최치흥의 손자들까지, 봉오동과 한국, 연길에 살고 있는 6촌 형제들이 함께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최운산 장군기념사업회 윤경로 이사장님과 임원들, 만주 무장독립운동 전공 연구자인 신주백 교수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이 동행했다. 연변역사학회 회장인 김춘선 교수와 김태국, 허영길 등 역사학자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과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봉오동 수남촌의 라철룡 촌장과 마을의 간부들이 함께 했다.



제막식 상차람은 연변식으로 했다.


연변식 제사상을 준비했다. 수남촌 부녀회에 상차림을 부탁했는데 증조부께서 좋아하셨을 순대와 삶은 돼지고기를 올리고 한국에서 가져간 술과 북어포를 올렸다. 증편, 찰떡, 월병, 과자, 그리고 다양한 과일과 음료수가 상석을 가득 채웠다. 낯설었지만 알록달록 재미있는 제사상 차림이었다. 상을 차리고 조촐한 기념식을 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출처 :  한겨레온  https://cdn.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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