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과 보훈처의 역사 왜곡

관리자

2020.12.20

| 최진동 장군은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의 영웅이다!



▲ 최진동 총사령관이 (오른쪽)이 홍범도 연대장(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2020년은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 100주년이다. 봉오동전투를 이끈 총사령관은 최진동장군이다.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완성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이 없었으면 봉오동의 승리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이제야 역사가 확인하고 있다.


 사실 10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전투 전체를 지휘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홍범도는 연대장으로 봉오동전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당시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위치하게 했다.”는 1920년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문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역사왜곡이 일어났을까!


 봉오동전투와 관련된 논문을 모두 살펴보면서 전문 연구자들이 선행 연구자의 논문을 재인용하는 과정에서 원 사료로 재확인하는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그의 실수나 오류까지 그대로 답습하거나 확대 재생산한 탓에 빚어진 웃지 못 할 결과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학계의 관행이라고 덮고 넘어가기엔 그로 인해 비틀어진 수십년 역사에 대한 책임이 너무 무겁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연구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시대와 사회상을 먼저 돌아보고 그 시기를 함께 했던 여러 인물들의 삶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시간과 사료의 한계를 핑계로 그런 과정을 외면하고 한 개인을 영웅으로 상정하고 사료를 끼어맞추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그렇게 수십년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가 고착화되고 역사가 되었다.


 승전 100주년이 된 지금까지 봉오동전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논문이 단 한편도 없다. 그만큼 그 분야가 학계에서 외면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연구자가 없으니 그 시기와 인물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나올 때 그 내용의 진위를 검증할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모르니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정보에 학계가 침묵으로 동조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진동 장군이 당한 역사적 외면이 그런 경우다.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공산당을 반대한 지주’라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누명을 씌우고 폄훼했다.


 봉오동전투와 최진동 장군 일가 연구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던 젊은 학자들이 그가 친일파일지도 모른다는 꼬리표를 보고 지레 포기한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학계에서 역사의 주인공이 외면당하는 사이 의병 출신의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봉오동 독립전쟁의 역사가 재구성되기 되기 시작했다.


 정규군대의 조직체계 아래, 제대로 된 군복을 입고 신형무기를 들고 싸워 이긴 봉오동 독립전쟁이 ‘헐벗고도 굶주리는 만주독립군, 무기도 식량도 없는 게릴라부대, 애국심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 기적’의 역사로 축소 왜곡되었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일은 그 일을 제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보훈처가 오히려 최진동 장군을 친일파로 몰아 서훈을 박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몇 가지 검증되지 않은 자료로 그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시도하는 보훈처의 서훈심사위원회가 제시한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제일 먼저 최진동 장군이 밀고자라는 주장으로 첨부한 “봉위동에 사는 최명록의 밀고”라는 제목의 문서다. 그러나 이 문서의 어떤 내용이 문제인지 왜 최진동을 친일이라고 규정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단지 제목에 들어있는 ‘밀고’라는 표현이 친일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런 수준의 자료를 준비하는 보훈처에 애도를!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밀정들이 각각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문서가 모두 정확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밀정들은 마치 숙제를 하듯이 자기의 관점에서 살펴본 내용을 취합해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다고 하더라...” 류의 소문을 기록한 것도 많다. 그 보고서의 내용이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구자가 먼저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한 다른 보고서들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내용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난 보훈처가 제시한 자료에는 그런 근거 제시가 전혀 없다. 이는 봉오동의 역사와 최진동장군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단순히 ‘밀고’라는 표현 하나에 천착해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자료는 1911년 5월 10일자의 문서다. 당시 최진동 장군에 대해 같은 시기 다른 자료가 존재한다. 1911년 6월 12일자 일제 외무성자료에는 “유하하 부근 봉오동에 러시아령으로부터 의병 수백 명이 도착할 예정으로 봉오동에서 식량과 물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같은 해 일본의 만주정책 방향을 이끌었던 일본 육군대좌 사이토 마코토(齋藤)는 만주 및 노령 지역을 직접 답사하고 작성한 조사보고서에서 백초구 부근 봉의동(봉오동)에서 노령으로부터 도착하는 의병 수백 명을 위해 식량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언급하며 백초구 부근은 독립군들이 왕래하고 은신하는 곳으로 최고의 경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령과 북간도 독립운동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에 봉오동이 있다. 봉오동은 1908년 최진동(최명록) 일가가 이주하면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마을을 일군 곳으로 만주 독립군 출신의 역사가 이강훈 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져 있었다.”


 “봉오동은 대부분이 새로 지은 번듯한 가옥인데다가 특히 상촌은 도로망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일부당천 만부부당한 요새로 된 것을 인공을 가해서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꾸미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새로 지은 목조 교사校舍가 있었으며, 교사 앞에는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었다.”


 최진동 장군 형제들이 봉오동 일대의 땅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무장투쟁의 전진기지인 봉오동 자체가 최진동장군 일가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오동에서 자신들의 재산으로 독립군 수백 명의 식량과 물자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군의 동태를 밀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진동 장군은 1911년 이전부터 무장투쟁을 이어왔다. ‘13도의군(이상설 등이 조직한 항일 의병 조직)’의 장의군 종사였던 용연 김정규는 그의 일기 『야사』에서 1909년에서 1911년 무렵 봉오동을 오가며 최진동장군과 함께 의병 봉기를 도모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봉오동) 최명록씨 댁을 찾아갔다가 마침 이희일씨를 만나 함께 묵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봉오동에 사는 최명록씨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숙하였다.”


“아침식사 후에 최명록 씨가 돌아갔다. 나는 저쪽 편 동포 모집하는 것에 대해 부탁을 하러 멀리까지 배웅하며 말을 하고서 자리를 마쳤다”


 이에 대해 학자들도 “(김정규는) 1910년 8월에는 徐相郁· 崔明錄· 李德 등과 의병봉기를 추진하기도 했다.”고 그들의 연구에서 밝히고 있다. 1910년 의병봉기에 앞장서고 1911년 노령지역 독립군과 연계해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최진동 장군이 무슨 이유로, 무엇을 바라고 일제에 밀고 행위를 한다는 말인가.


 1912년 무렵 최진동장군은 배일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던 북간도 간민회 왕청현 지회장이었으며, 1919년에는 약1,500명이 참여한 ‘왕청 3.26 독립선언식 및 만세시위’ 주도했다. 일제는 시위를 주도한 수괴자首魁者로 최진동 장군을 지목했다.


 또 1919년 5월 24일자 비밀문서에서 일제는 최진동장군에 대해 ‘극단적 배일주의자’로서 활발하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며 국내 일제헌병주재소 공격을 공언하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이는 보훈처의 ‘밀고자’라는 주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평가다.





 “최명록, 위 사람은 중국에 귀화하여 현재 중국육군배장支那陸軍排長을 맡고 있으며, 극단적 배일(排日)주의자로서 이번에 관직을 사임하고 귀래하여, 활발하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자신은 항상 ‘피스톨 권총’을 휴대하여 집에는 십 수개의 군용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낮에는 산간에서 밀렵을 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 부하 수명을 데리고 병기를 휴대하여 야간 경계근무를 수행하며 그 일대의 지역에서 배일학교 설립을 위해 설립비용 만 원을 모금중인데, 그는 항상 “조선 헌병주재소는 약 50명으로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하고 총기의 매입을 위해 다방면으로 손을 쓰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승리를 비롯해 최진동 장군의 혁혁한 무장독립운동의 행적들은 학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제시할 수 있지만, 지면 관계상 언급을 생략한다. 


 한편 보훈처는 어처구니 없게도 심사 자료에서 1919년 북간도 왕청현에서 3.26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봉오동 독립군기지에서 독립군을 훈련 양성해 봉오동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장군의 위상과 최진동장군의 무장투쟁 행적들은 전부 배제했다.


 오히려 보훈처가 제시한 사료는 최진동 장군에 대한 1911년의 다른 일제 자료들과 함께 검토하면 ‘최명록에 대한 밀고’로 판단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보훈처는 ‘밀고’라는 단어 하나만을 뽑아서 최진동 장군을 친일행위자로 단정하는가? 그 사실을 뒷받침할 당시 자료가 하나라도  있었는가?


 최진동 장군에 대한 수많은 자료 중 당시 일제에 의해 ‘극단적 배일주의자’로 평가 받는 최진동 장군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를 서훈심사위 자료에서 모두 배제한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보훈처는 먼저 답해야 한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출처   :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593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