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바로알기

3·1독립운동과 봉오동전투

1919년 2월 1일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이,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선언서가 선포된 후 우리 민족이 살고 있던 여러 지역에서 독립선언이 선포되었고 거족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렇게 고취된 독립정신이 결집되어 연해주와 중국, 서울에 임시정부가 결성되었고 이어 각 지역 임시정부가 통합해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자주독립의 열망이 고조되던 1919년 당시, 북간도 봉오동에는 정식 군사훈련을 받고 신형무기로 완전무장한 670명 규모의 정규군 편제를 갖춘 독립군 부대 ‘도독부’(사령관 최운산)가 존재하고 있었다. 1912년 최운산 장군이 만든 사병부대에서 출발한 독립군 부대였던 도독부는 1919년 임시정부 출범과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휘하의 독립군 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사령관 최진동)로 재창설 되었다.

1920년에 대한민국 수립 2년차를 맞은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같은 해 1월 임정 ‘국무원 포고 1호’와 ‘군무부 포고 1호’를 공표해 동포 청년들이 독립군에 지원해줄 것을 촉구하는 한편 간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여러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해 독립군단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임정의 계획에 발맞추어 최운산 장군은 1920년 1월 길림성 도문시 석현진 지역 토지를 매각한 당시 돈 5만원으로 체코군단으로부터 유럽제 신식무기를 구입했는데 일제 자료에는 “소총 500정 구입, 탄환 5만발, 권총 430정, 권총탄환 5000발, 기관총 2문 구입(3월 19일 보고). 소총 700정 구입(4월 5일 보고).” 등 대한북로독군부가 연해주에서 신식무기를 구입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상기의 무기구입 기록과 1919년 이미 활동했던 대한군무도독부의 완전무장 병력(670명)만 합해도 당시 봉오동 지역의 독립군 숫자는 2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된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에 의해 시도된 60여 차례의 국내 진공작전 중 36차례가 대한군무도독부에 의해 시도됐다. 이와 함께, 봄부터 북간도 지역의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통합을 논의하여5월 11일 신민단, 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국민회, 의군단 등 6개 단체가 18개항의 합의문 작성한 이후 1920년 5월 19일 국민회군과 대한군무도독부가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독립군 통합군단은 대한군무도독부의 본영인 왕청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켜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는 한편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당시 대한북로독군부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 약 550명 포함1300여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북로군정서와 사관연성소의 독립군을 비롯한 연해주 독립군의 합류가 이어지면서 수천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포 10여 문, 기관총 수십 정, 수류탄 수천 개, 장총 1800여 정, 권총 수백 정 등의 유럽제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산하에 제1, 2, 3연대를 두는 등 정규군다운 조직 편제를 갖추었다.

북간도 독립군이 통합군단을 이루며 규모를 확대하고 국내진공작전 등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개시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1920년 5월 ‘독립군기지 봉오동 초토화 작전’을 계획하였다. 1920년 6월4일 대한군북로독군부 예하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국경초소지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시킨 ‘삼둔자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직후 일본군제19사단은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 천명규모로 추정되는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북간도 봉오동의 독립군기지를 습격했지만 ‘대한북로독군부’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뛰어난 전투력에 대패하여 퇴각한 것이 ‘봉오동 독립전쟁’의 본질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승첩에 따르면 1920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이틀 동안 벌어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피해를 입고 패퇴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의 기록과 홍범도일지 등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자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이라고 증언되고 있다.

또한 중경상자 30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본군 본대에 복귀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일본군 병력 총원이 500여명이었다는 설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최소 2천명 이상의 규모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퇴각 당시 중경상자 300여명이 복귀하려면 300~500명의 일본군이 중경상자들을 부축하거나 운반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군과의 최초의 유의미한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봉오동 독립전쟁은1910년 한일합방 직후부터 꾸준히 정식 군사훈련을 받으며 양성된 독립군 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 군단이 잘 구축된 요새에서 우수한 유럽제 무기로 무장하고 통합된 지휘체계로 전쟁에서 승리한 귀중한 역사다.

대한북로독군부 등 독립군 부대의 존재와 봉오동 독립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군의 뿌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1940년 9월 17일 창설)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 시각이지만 1920년대 당시 간도와 만주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던4,000여명의 독립군은 스스로 자신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소속 정규군의 자격으로 싸웠다는 증언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최운산 장군도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 직후 1912년부터 양성해온 670명 규모의 사병부대인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군대인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하여 36차례의 국내 진공작전과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을 담당했다.

임시정부 산하 대한군북로독군부 정규군 병력이 당시 독립군 토벌을 위해 투입됐던 최정예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봉오동 독립전쟁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게릴라 부대가 천운으로 우연히 일본군에게 이겼다는 평가는 잘못된 시각이며 당시 전투기 몇 대를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의 전재산을 쏟아 부어 봉오동을 요새화하고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유럽제 신식무기로 무장시키는 등 대한군북로독군부가 만반의 준비를 갖춰 일본군과 싸울 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