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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동 친일 논란에 대한 반박 (최진동 장군의 행적 관련 보훈처 소명 요청에 대한 답변)_자료첨부

관리자

2021.01.08

최진동 장군의 행적 관련 보훈처 소명 요청에 대한 답변


보훈처 주장1


    ①-1 독립군의 동향을 중국측에 밀고(1911년),

    ①-2 중국 길림성 독련 맹부덕에게 독립군의 정보를 밀고(1923년)


    ①-1 독립군의 동향을 중국 측에 밀고했다는 보훈처 제시자료

        불령단관계잡건- 배일적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1911. 5. 10)

        온성 간도 봉위동(유원진의 對岸 일명 봉오동) 거주 최명록이 밀고한 내용으로 局子街   田熊曹長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一. 함경북도 온성읍 元 陸軍副尉 崔齊剛(혹은 江,岡)은 日露전몰 후 李範允이 露兵과 함께 露領으로 도주할 때 군총 및 私砲 합계126정을 숨겨 對岸 涼水泉子로 운반하여 同地 에서 淸人 잡화상 山海成(商號이든지)에게 맡겨 지금은 청인의 집에 은닉했다라고 한다.

        二. 본년 3월 중순 露領에으로부터 온 폭도가 조선으로 들어갈 당시에 현재 최(재강)副尉는 양수천자로 향하고 있었다. 同地에는 嚴仁燮도 와서 만나고 앞서 은닉한 총을 가지고 온성방면으로 入鮮하고자 협의했다고 한다.(엄인섭이 온 것은 洪範道가 秋豊에서 烟秋로 와서 엄인섭과 회견한 후 엄인섭으로 하여금 양수천자로 오게 했다고 함). 그때  온성읍 사람 약간 명도 오고 기타 嚘呀河, 봉위동 부근의 사람 수십 명이 집합했다고 한다. 그런데 먼저 入鮮한 폭도 一隊가 鐘城郡 細川지방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시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하여 먼저 부하를 해산시키고 엄인섭은 연추로, 최 부위1)는 온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三. 양수천자의 山海成에는 元山사람 金某라는 자가 체재하며 연락임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1-1. 최진동 장군이 중국 측에 밀고에 했다는 주장에 대한 소명


    보훈처가 제시한 자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봉위동에 사는 최명록의 밀고(崔明祿ノ密告トシテ)”라고 하는 한마디 표현이다. 이는 봉오동의 역사와 최진동 장군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단순히 ‘밀고’라는 표현 하나에 천착해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1911년 5월 10일자의 문서다. 그러나 최진동 장군에 대해 같은 시기 다른 자료가 존재한다. 1911년 6월 12일자 일제 외무성자료에는 “유하하 부근 봉오동에 러시아령으로부터 의병 수백 명이 도착할 예정으로 봉오동에서 식량과 물자를 준비”2)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같은 해 일본의 만주정책 방향을 이끌었던 일본 육군대좌 齋藤도 만주 및 노령 지역을 직접 답사하고 작성한 조사보고서에서 백초구 부근 봉의동(봉오동)에서 노령으로부터 도착하는 의병 수백 명을 위해 식량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언급하며 백초구 부근은 독립군들이 왕래하고 은신하는 곳으로 최고의 경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3) 노령과 북간도 독립운동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에 봉오동이 있다. 봉오동은 1908년 최진동(최명록) 일가가 이주하면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마을을 일군4)곳으로 만주 독립군 출신의 역사가 이강훈은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져 있었다.” “봉오동은 대부분이 새로 지은 번듯한 가옥인데다가 특히 상촌은 도로망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일부당천 만부부당한 요새로 된 것을 인공을 가해서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꾸미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새로 지은 목조 교사校舍가 있었으며, 교사 앞에는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었다.”5)고 기록했다. 최진동 장군 형제들이 봉오동 일대의 땅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무장투쟁의 전진기지인 봉오동 자체가 최진동장군 일가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오동에서 자신들의 재산으로 독립군 수백 명의 식량과 물자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군의 동태를 밀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진동장군은 1911년 이전부터 무장투쟁을 이어왔다. 13도의군 장의군 종사였던 용연 김정규는 그의 일기 『야사』에서 1909년에서 1911년 무렵 봉오동을 오가며 최진동장군과 함께 의병 봉기를 도모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봉오동) 최명록씨 댁을 찾아갔다가 마침 이희일씨를 만나 함께 묵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봉오동에 사는 최명록씨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숙하였다.” “아침식사 후에 최명록 씨가 돌아갔다. 나는 저쪽 편 동포 모집하는 것에 대해 부탁을 하러 멀리까지 배웅하며 말을 하고서 자리를 마쳤다”6) 이에 대해 학자들도“(김정규는) 1910년 8월에는 徐相郁· 崔明錄· 李德 등과 의병봉기를 추진하기도 했다.”고 그들의 연구에서 밝히고 있다.7)1910년 의병봉기에 앞장서고 1911년 노령지역 독립군과 연계해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최진동 장군이 무슨 이유로, 무엇을 바라고 일제에 밀고 행위를 한다는 말인가. 

  
   1912년 무렵 최진동장군은 배일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던 북간도 간민회 왕청현 지회장이었으며, 1919년에는 약1,500명이 참여한 ‘왕청현 3.26 독립선언식 및 만세시위’ 주도했다. 일제는 시위를 주도한 수괴자首魁者로최진동 장군을 지목했다. 


        간도 배초구에서는 예전부터 3월26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개시하려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였는데, 드디어 당일 대경자, 목단강, 하마탕, 대왕청, 나자구(배초구에서 26리)등에서 집합한 자가 약1천5백 명(이 중 사립학교 및 서당의 조선인 학생 약 2백명 및 중국인 약 1백명)은 백초구 왕청현경찰서)에서 북방 약 10정(일본영사분관에서 10정)의 산록에서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수괴자는 귀화 조선인 최명록 및 최모 등으로 구 한국기 또는 지나국기를 게양하고 각자는 작은 깃발을 손에 들고 만세를 높이 불렀으며, 식장에는 단군교, 시천교, 예수교의 목사 등이 차례로 일어나 연설을 하였다.(하략)8)


    또한 1919년 5월24일자 비밀문서에서 일제는 최진동장군에 대해 ‘극단적 배일주의자’로서 활발하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며 국내 일제헌병주재소 공격을 공언하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보훈처의 ‘밀고자’라는 주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평가이다.


        최명록, 위 사람은 중국에 귀화하여 현재 중국육군배장支那陸軍排長을 맡고 있으며, 극단적 배일(排日)주의자로서 이번에 관직을 사임하고 귀래하여, 활발하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자신은 항상 ‘피스톨 권총’을 휴대하여 집에는 십 수개의 군용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낮에는 산간에서 밀렵을 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 부하 수명을 데리고 병기를 휴대하여 야간 경계근무를 수행하며 그 일대의 지역에서 배일학교 설립을 위해 설립비용 만 원을 모금중인데, 그는 항상 “조선 헌병주재소는 약 50명으로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하고 총기의 매입을 위해 다방면으로 손을 쓰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다.9)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를 승리를 비롯해 최진동 장군의 혁혁한 무장독립운동의 행적들은 학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제시할 수 있지만 지면 관계상 언급을 생략했다. 보훈처는 1919년 북간도 왕청현에서 3.26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봉오동 독립군기지에서 독립군을 훈련 양성해 봉오동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장군의 위상과 최진동장군의 무장투쟁 행적들을 전부 배제했다. 이 사료는 최진동 장군에 대한 1911년의 다른 일제 자료들과 함께 검토하면 ‘최명록에 대한 밀고’로 판단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왜 보훈처는 ‘밀고’라는 단어 하나만을 뽑아서 최진동 장군을 친일행위자로 단정하는가? 당시 그를 뒷받침할 자료가 있었는가? 최진동 장군에 대한 수많은 자료 중 당시 일제에 의해 ‘극단적 배일주의자’로 평가 받는 최진동 장군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를 서훈심사위 자료에서 모두 배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①-2 중국 길림성 독련 맹부덕에게 독립군의 정보를 밀고했다는 보훈처 제시자료

        1) 최진동이 중국 관헌 앞으로 보낸 밀고서에 관한 건(1923.11.13.) 

        불령선인 영수領袖 최진동이 10월25일 동녕현 중국 관헌에 의해 체포된 사안은 이미 보고(11월7일)한 대로이다.10) 앞서 同人은 돈화현 보위단 총련관總練官인 맹부덕의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을 기회 삼아 불령선인 김광, 마룡하, 홍진우, 안무, 구춘선 등의 무리가 러시아 赤軍으로부터 다액의 돈을 받아 돈화 액목현을 근거지로 삼아 赤軍의 분회(공산당의 지부와 같은 것)을 설치하고, 중국 영내에서 무지한 조선인을 규합하여 東三省일대를 소란케하려 企圖하고 있다는 취지를 맹 독련에게 비밀리에 고하였다. 

        2) 간도 접양지방 및 기타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1923.12.10.) 최명록은 11월 중순 참모 최종하 등 15명을 인솔하고 노흑산을 경유하여 왕청현 나자구로 왔다. 同地에서 옛부하 최덕 외 7,8명을 불러와 중대장으로 임명해서 부대를 편성하고 기타 협의를 하는 한편, 돈화방면에서 행동한 이홍래에게 연락하여 점차 동년현 하에서 부하 무장대를 이동시킬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강국모는 최명록과 합동으로 행동하기로 약속했는데 10월 중 군복170착을 독단적으로 노령으로 운반하고자 한 것을 최(명록)가 탐지하게 되었따. 논쟁한 결과, 중국 관헌에게 공산당과 암통했다고 밀고하고 縣城 경찰을 사주하여 체포시켰다. 이에 구금 중인데 이후 최의 분노가 가라앉아 석방 방도를 운동 중이다.

        3) 최진동이 중국관헌에 밀고한 불령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1924.1.22.) 연길현 보위단 사무소 훈령 제287호 제83호에 의거하여 독군 대리의 訓電에서 말한다. 전에 주돈화현 단장 손원영의 보고에 의하면 재돈화 독련 맹부덕에 대하여 최진동이 보낸 밀신의 한 절 안에 한인무리 김광 등이 露國 赤堂으로부터 거액의 금전을 받아서 일반 무지한 한인들을 규합하여 赤堂을 조직하고 東支沿線 지방을 요란하게 하도록 도모하고 몰래 돈화, 액목 두 현지방에 잠복하여 지반을 다졌으므로 속히 방범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맹독련의 말에 의하면 해당 최진동은 한인으로서 중국 국적에 입적하여 왕청현에 거주한지 이미 몇 년이라고 한다.

        별지 최진동 밀신

        (상략) 이에 韓民 김광 마룡하 홍진우 안무 구선일 등 죄악의 무리는 露國의 赤堂으로부터 거금을 받아서 다같이 중국 경내로 와서 일반 무지한 한민을 규합하고 赤旗團 분회를 조직하여 東支沿線 방면을 소란케하고 돈화 액목현 등지로 잠거하여 지반을 닦고자 하였다. 이러한 류 화근의 발호된 것이 오래되어 왔으므로 속히 이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장차 同省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앉아서 致亂을 보는 일은 견딜 수 없기에 여러 말로 이를 각하에게 삼가 보고할 뿐으로 모름지기 속히 후환을 없애버리기 바라고 나머지는 다시 보고할 것을 기약하겠다고 운운하다.



1-2. 맹부덕에게 독립군의 정보를 밀고했다는 주장에 대한 소명


    보훈처는 위의 3개 문서, 곧 최진동 장군이 중국 관헌, 돈화현 보위단 총련관總練官 맹부덕에게 돈화현과 액목현 지방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을 조심하라고 비밀히 전언한 것을 최진동 장군의 친일 증거자료로 제시했다. 오랜 친분이 있던 중국관헌에게 공산당(赤堂)을 경계하라고 조언한 것이 어떻게 친일행위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보훈처가 친일자료로 제시한 위의 3개 문서에서 첫 단락은 “불령선인不逞鮮人 영수領袖 최진동”으로 시작한다. “불령선인 영수領袖”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독립군 우두머리’, ‘독립군 대장’이라는 뜻이 아닌가. 최진동 장군이 맹부덕에게 위에 있는 편지를 보냈던 시기 최진동 장군에 대한 1923년 12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동녕현 삼차구 부근에 있는 조선독립단들은 모두 최진동의 부하로 현재 고안촌에 있는 조선인 경영 기독교회부속초등학교를 본부로 하고 그 부근 인가에 혹은 이삼 명씩 혹은 삼사 명씩 머물러 있으며 삼분구 현아에 유치 중이든 강국모의 부하도 최진동의 부하가 되야 현재 칠백 명이나 된다더라.”고 전한다. 그가 독립군이라는 사실, 그중에서도 ‘독립군 대장’이었다는 사실이나 편지를 보낸 곳이 일제 관헌이 아니라 중국 관헌이라는 것도 무시하고 있다. 최진동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협조를 받고 있던 중국측에 편지를 보낸 것이 왜 친일행위란 말인가.


    보훈처는 두 번째 문서에서 최진동 장군이 “군복 170착을 독단적으로 노령으로 운반하고자 한” 강국모를 “중국 관헌에게 공산당과 암통했다고 밀고”했기 때문에 친일행위라고 주장하는가. 같은 독립군을 중국관헌에 신고하면 친일인가? 당시 우리 독립군은 하나의 체계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지 못했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서로 다른 종교관에 따라 다른 주장들이 부딪쳤다. 그래서 신념과 필요에 따라 다른 단체를 중국관헌에 신고해서 일시적으로 활동에 제약을 가하거나 경고를 준 경우가 많다. 계봉우, 구춘선을 비롯한 다른 독립군 대장들이 그랬다.11) 봉오동전투 이후 노령으로 갔던 우리 독립군들은 러시아 赤軍의 첨병이 되어 시베리아에 있는 일본군과 싸웠지만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를 시작하자 독립군들의 쓰임새가 다했다하여 우리 독립군들은 1923년 쫓기듯 중국 동북으로 돌아와야 했다. 최진동 장군은 보다 안정적인 독립군의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중국 흑룡강성 삼동의 땅을 사들이며 ‘이상향’ 건설을 추진했고 그 매입원으로 강국모를 정했다.12) 그만큼 신임을 했던 장군이었으나 강국모는 그 신임을 배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최진동 장군은 다시 강국모를 받아들이고 강국모는 최진동 장군의 수하로서 행동을 함께 투쟁했고, 1924년 최진동 장군이 장작림에게 붙잡힐 때도 함께 붙잡혔다.


    최진동 장군은 중국 동북으로 돌아와 다시 총군부 군대를 편성해서 독립군들의 전열을 정비했고 11월 하순 영고탑에서 독립군단체 합병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총군부에서 최진동 장군이 선임한 엄준, 동우회의 김좌진, 이석, 적기단의 구춘선, 마보, 광정단 단장 김호, 광복군단 이영식, 군비단, 흥업단, 야단, 맹호단 등이 참석했다.13) 이 회의에서 적기단은 공산주의에 의한 통일을 도모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단체 대표들은 조국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공산주의로써 이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함으로 이에 반대하여 통일회의는 파열되었다.14) 최진동 장군은 자유시참변으로 수많은 독립군을 잃는 사건으로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더구나 독립단체 합병회의에서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독립군의 통일적 행동을 어렵게 만들고 돈화현과 액목현 방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는 적기단赤旗團에 제동을 걸고자 평소 친분이 있던 맹부덕에게 공산주의 활동을 경계하도록 전언을 했던 것이다. 공산주의 활동을 중국 관헌에게 신고하면 친일인가? 보훈처가 말하는 친일행위의 기준은 무엇인가!



보훈처 주장 2. 1924년 중국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1926년 석방되자 간도 일본총영사관에 귀순


    ② 1926년 석방되자 일본영사관에 귀순했다는 보훈처 제시자료

    1) 「朝鮮獨立運動者 崔明祿 自首 申告에 關한 件」 (1926년 12월 8일) 

    최명록은 1919년 조선소요사건 때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 부근에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독립운동기관을 설치하고 그 부장이 되어 同志를 모집하고 독립운동에 노력하였다. 1920년 我軍(일본군)이 간도로 출동할 때 부하를 이끌고 동녕현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버린 자인데, 1924년 9월9일 동령현 오참에서 직군(직예파 군벌)에 연락한 협의로 同지방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길림독군공서에 압송된 이래 구금 중이었다. 본년 8월 석방되어 그 후 집으로 돌아올 목적으로 길림을 출발해 도중에 돈화에 체재하면서 간도지방에서 일본과 중국 관헌의 의향을 탐지하고 11월 27일 돈화를 출발 12월 3일 국자가에 도착하였다. 우선 연길 도윤에 신고한 다음 12월 6일 당관(일본 간도총영사관)에 신고를 했다. “나는 왕년 조선 독립운동자로 옹립되어 북로독군부 부장이 되어 부득이 독립운동에 종사해 일본 측으로부터는 그 주모자와 같이 인식되었다.15)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이 때문에 8년간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여러 가지 고된 일을 겪었다. 내 한 몸이라면 오히려 견딜 수 있으나 나의 부하도 이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여 금일 일본의 옥사에서 신음하거나 혹은 노령으로 도망가 喪家의 개 취급을 받으니 참으로 인정상 참을 수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중국에 귀화하여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생활하고 있기에 재차 조선의 독립 등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16) 마침내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되었으니 지금 다시 나의 불명을 후회하고 뉘우치는 바이다. 바라건대 재차 근신하여 한 뜻으로 가업에 매진하고 각지에 유랑하는 예전 부하들을 招致하여 오로지 농업에 종사시키려 하니 특별히 관대하게 처치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진술하였다. 同人은 조선어보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그 언동과 행동거지는 거의 중국인과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길림 감옥 在監 중부터 심히 건강이 악화되고 있고, 크게 改悛의 정이라는 것도 인정하여 기소유예 처분에 부쳐서 금후 언동을 감시하는 것으로 한다. 일찍이 본 건에 대해서는 연길 도윤도 양해하고 있는 바이다. 추가로 본인(최진동)은 일본관헌에 신고한 것으로 인해서 동지들로부터 저격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模樣이므로17) 본 건은 당분간 신문지 등에 발표하지 말도록 하였다.


    2) 만주국 경찰서 직원록 (1943) 선인주요인물 조사표(1940.12)

    최명록(別名 진동, 당54세) 현주소 연길현 도문가 춘화향 길림로1909년 보안대장 겸 경찰서장을 봉직하고 1920년에 조선독립운동 독군부 조직의 총사령으로 부하 500여 명을 지휘하여 무력행동을 이끌었으며, 직예파와 맥을 같이하며 배일민족운동을 계속 진행하던 중 1926년 일본 총영사관에 귀순한 이후 농업에 종사 



2. 1926년 석방되어 귀순했다는 주장에 대한 소명


    최진동 장군은 1924년 9월 9일 중국 동령현 오참五站 부근에서 오패부 군벌과 협조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장작림 군벌에 잡혀서 길림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1926년 8월 15일 석방되었다. 그런데 보훈처는 일제의 1926년 최진동장군의 길림감옥 석방관련 보고서를 최진동 장군 귀순 증거로 주장한다. 이 주장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최진동 장군 수감 전후 상황을 이해하고 석방관련 다른 일제보고서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장작림이 최진동 장군을 체포하게 된 배경과 이유는 전적으로 1924년 9월에 시작된 중국 봉계 군벌 사이의 대립인 ‘직봉直奉전쟁’이다. 1923년 말부터 2차 직봉전쟁의 기운이 중국 동북을 뒤덮었다. 당시 최진동 장군과 독립군들은 장작림 군벌이 친일로 돌아선 후 우리 독립군을 배반한 장작림이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오패부 군벌과의 제휴를 도모하고 있었다. 1924년 9월 장작림은 2차 ‘직봉전쟁’을 시작하며 오패부 군벌을 도울 수 있는 우리 독립군을 견제하고 약화시키는 조치로서 중국인을 매수해서 최진동 장군을 체포했다. 최진동 장군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 연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장작림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동생 최운산 장군도 장작림의 계략으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청진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의 자료들은 1924년 수감 전 최진동 장군이 수천의 독립군을 양성하며 독립군을 이끌고 있던 상황과 오패부와 연락한 것을 빌미로 최진동 장군을 구속하게 된 중국의 정치적 배경을 보여준다. 


    “중국만주 길림성장은 동녕현 지사에게 통고하여 주방제4단에 배일하는 조선인을 취췌하라고 명령하였는데... 내밀한 관계를 가진 중국인을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그들은 조선인 최진동이라는 동양대의단의 총사령관의 부하가 된 것이 판명되었는데 그는 훈춘 니코리스크 지방에 잠복한 부하 1,000명을 거느렸고 기관총과 야포 등까지 소유하였음으로 중국관헌은 크게 경계 중이라고 한다.”18)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북간도와 아령방면 근처에 근거를 둔 독립당 최진동이 거느린 다수의 부하가 무기를 가지고 그 세력이 매우 굳세다 한다. 중국 관헌 간에서도 매우 염려하고 있다. 동녕현 지사가 조사하여 길림성 성장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최진동의 부하는 4,199명이며 장총이 4,059개이며 기관총이 27개이며 대포가 4문이라고 한다.”19) 

    
    “송대명은 오패부와 연락을 긴밀히 하여 벌써 군자금 50만원을 마련하였고 다음과 같은 계획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최진동을 원조하여 조선인독립단 4천 명을 무장시켜 오참五站 방면 노령내로 분주分駐시킨다. 노농적군 군헌의 양해를 얻어 니코리스크 서쪽지방을 근거지로 하고 소총 3천정, 기관총 15정, 야포 6문을 준비한다. (중략) 북만 또는 간도방면의 일반 조선인들에게 만약 장작림을 도멸하면 조선의 독립은 아주 쉽게 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다.”20)


    “ ...김좌진은 어떤 유벽한 시골에 있어서 농사에 종사하여 봉직奉直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겠다고 언명까지 하였고 현금 대한통의부 중앙파 간부 몇몇은 흥경 부근 모처에 집합해서 奉直線에 대한 태도 여하를 협의한 결과.... 출석자 대부분은 오패부측에 책응하고자 그 단체의 이름과 그 소속인원을 보건대 대략 아래와 같다. ◇의열단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고...(하략)”21)


    당시 김경천 장군은 최진동 장군 체포에 대해 “최진동, 강국모 두 사람을 중국인 관리가 체포하여 길림으로 압송해갔다. 이에 대해 말하자면 실로 이 두 사람은 지난 몇 해에 동안 나라 일에 분주하다가 불행을 당하였으니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22)고 기록했다. 


    2차 직봉전쟁은 장작림의 승리로 끝난 후 오패부 측으로 기울어졌던 최진동장군과 우리 독립군의 입지는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직봉전쟁에 승리하고 일본과 손잡고 있던 장작림도 독립군을 대표하는 최진동 장군을 일본의 요구대로 일제에 넘기거나 중국 감옥에서 함부로 대할 수만도 없었다.23) 중국정부는 최진동 장군과 함께 체포한 강국모는 1925년 4월 무죄방면 했지만 최진동 장군에 대해서는 방면하지 않고 있었다.24) 그러나 동지들과 친지들의 석방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마침내 1926년 8월 중국정부는 일제로부터 최진동 장군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조치와 함께 비밀리에 최진동 장군을 석방했다.25)


    중국 정부는 최진동 장군이 중국에 귀화 입적한 한인임을 분명하게 못 박고 “일본경찰이 최진동장군에게 마수를 뻗칠까봐 지방관헌을 배동시켜 봉오동에 보냈다.”26) 이런 중국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는 일제의 외무성보고서는 “중국측에서는 석방의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비밀히 보호”하고 있으며 “취포就捕 당시 신병의 인도를 길림총영사관에서 요구했지만 확보하지 못했고” “중죄 범인을 방면하며 어둠 속에서 비호”하고 있다고 중국측을 비난하고 있다.27) 그리고 이어지는 9월 일제 보고서에도 “최명록은 8월 석방되어 길림감옥을 출옥했으며” “중국측에서는 석방 후 일본측 경찰로부터 체포당하는 것을 염려해서 본가로 오는 중도

및 본가 부근의 중국 경찰분소에서 최명록의 신변보호에 노력하며 인원을 증가시켜 경계 중이다. 최명록은 아직 본가에 도착하지 않았다.”28)고 적고 있다. 


    보훈처가 제시하는 귀순 증거 문서는 위의 9월 보고서 이후 최진동 장군이 연길에 도착한 12월에 나온 일제문서이다. 일제는 최진동 장군이 건강 악화를 이유로 중국 당국으로부터 기소유예를 받아 석방된 후 12월 3일 연길 국자가에 도착해서 먼저 중국관헌에 신고하고 12월 6일 일본관헌에 신고했다고 적고 있고 보훈처는 최진동 장군이 석방 후 중국관헌과 일본관헌에 신고했기 때문에 귀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건강 악화를 이유로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왔으니 중국 당국에 신고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일본관헌에 신고했다는 보훈처의 주장은 당시 정황상 불가능한 주장이다. 석방 당시 8월과 9월의 일제 보고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제는 독립군 대장인 최진동 장군이 석방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서 중국 당국은 일제가 최진동장군을 체포할 수 없도록 조치들을 취하고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최진동 장군은 12월 3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왔음을 신고했다. 중국관헌은 일제로부터 최진동 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중국과 일제와의 관계상 그리고 일제가 최진동 장군을 체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영사관에 최진동 장군이 길림감옥에서 출소했음을 통지했다. 보훈처가 제시한 일제자료에서 최진동 장군의 진술 부분은 중국관헌에서 작성한 신고서의 일부분으로 일제문서에서는 따옴표 표시로 인용되어 있다. 일본영사관에 제출한 것이라면 대부분의 일제문서에서 보듯 전체 진술서가 별도로 첨부되어 있었을 것이다. 김춘선을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도 이 부분을 도윤공서에 신고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29) 더불어 일제는 오히려 일본 관헌에 신고한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자면서 구차하게 설명하고 있다.30)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최진동 장군은 중국 동북삼성의 지배세력인 “장작림 군벌에 의해 오패부 군벌에 협력한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이지 일제에 의해 잡혔다가 귀순해서 석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에 귀순했다면 중국측으로부터 보호조치가 왜 필요했겠는가? 중국정부는 “최진동장군을 가야하 파출소 소장이란 직무에 임명하여 일본영사관에서 그를 마음대로 체포하거나 마수를 뻗치지 못하게”31)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그리고 보훈처가 제시한 최진동 장군 사망 1년 전 1940년 12월 작성한 ‘鮮人主要人物 조사표’에서도 일제는 “직예파와 맥을 같이하며 배일민족운동을 계속 진행하던 중 1926년 일본 총영사관에 귀순한 이후 농업에 종사”했다고 적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던 독립군 사령관이 귀순하고 친일행위를 했다면 일제는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친일행위에 대한 언급도 없으면 다만 농업에 종사했다고 적고 있다. 최진동 장군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비할 수 없이 유명한 독립군 대장이다. 최진동 장군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과 일제의 보고서는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 보훈처와 보훈심사에 관여한 학자들은 다른 내용의 관련 보고서가 있음에도 그것들은 보지 않고 일제가 만들어놓은 가장 불리한 내용 하나를 골라서 귀순 증거자료로 제시하고 친일 분자로 몰아 삭훈削勳하려고 한다. 



참조 - 관련 일제 문서


1) 元督軍府 首領 崔明祿의 出獄後에 있어서 支那官憲의 態度에 關한 件

문서철명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3

문서번호 外務省文書課受 第256號

문서제목 元督軍府 首領 崔明祿의 出獄後에 있어서 支那官憲의 態度에 關한 件

발신자 芝崎路可(局子街 副領事)

수신자 弊原喜重郞(外務大臣)

발신일 1926년 09월 15일

최명록의 출옥 후에 지나 관헌의 태도에 관한 건

당관 유하하 分署長의 보고에 의하면 元 독군부 수령 최명록은 8월 석방되어 길림감옥을 출옥했다. 최명록의 본가 왕청형 봉오동에 있는 동생 최명순에게 보낸 8월 26일자 편지에 의하면 조만간 본가에 돌아올 것으로 보이나 중국 측에서는 석방 후 일본 측 경찰로부터 체포당하는 것을 염려해서 본가로 오는 중도 및 본가 부근의 중국경찰분소에서 최명록의 신변보호에 노력하며 인원을 증가시켜 경계 중이다. 최명록은 아직 본

가에 도착하지 않았다.


2) 鮮匪首領 崔明祿 釋放設에 關한 件

문서철명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3

문서번호 外務省文書課受 第499號

문서제목 鮮匪首領 崔明祿 釋放說에 關한 件

발신자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수신자 吉林總領事/ 外務省亞細亞 局長

발신일 1926년 08월 26일

鮮匪首領 최명록 석방설에 관한 건

1924년 9월부터 길림제1감옥에 구금중의 元鮮匪團 北路督軍府 府長 최진동 또는 최희, 최명록은 이번에 성장省長 사무를 대리하는 정무청장의 경질을 기회로 본월 15일 염원하던 석방을 받았다. 최명록은 1920년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로 하는 앞서 기술한 독군부라는 것을 조직해서 부하 수백 명을 데리고 무수히 약탈을 하고 양민을 학대하던 사람으로 동년 6월 우리 군대가 간도에 진출할 때에 북방으로 패퇴해서 다시 동령현 삼차구 지방에서 잔당을 규합해서 줄기차게 강도행위를 감행하고 입에 풀칠을하며 재물에 제공하는 집에서 머무르며 어리석은 짓을 하다 1924년 9월 奉直時局에 맞닥뜨려서 직군파 수령 오패부와 연락한 사실이 있는 것을 지나 관헌에서 탐지 체포해서 위 길림독군공무서에 압송을 당하였다. 가족들이 길림을 왕복해서 석방운동을 하던 중 이번에 그 목적을 달성해서 석방의 동기가 결실을 맺고 운동의 결과로써.. 중국 측에서는 석방의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비밀히 보호하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있다. 전후의 사정으로부터 추측컨대 .... 원래 최진동은 조선인으로서 취포就捕 당시 신병의 인도를 길림총영사관(貴官)에서 요구했지만 아직 확보하지 못했고 차제에?? 중국측 거짓에 일임하는 것도 이와 같은 중죄범인을 방면하며 어둠 속에서 비호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이런 종류의 불령행동 취췌상에서는 유감이며 차제에 길림총영사관에서는 途上사정 엄정 조사해서 위 중국 측에 석방한 것을 엄중 경고하고..



보훈처 주장 3. 일제 비행기 고사포 자금 등을 위한 국방헌금 납부


    ③ 국방헌금 납부 관련한 보훈처 제시자료

    동아일보(1937. 11. 2) 국방헌금· 위문금 

    도문圖們 당지에서 8월 25일에 헌금취급위원獻金取扱委員을 선거하여 금일에 이르도록 취급한 전액은 4,000여원에 달한바, 그 중 2,000원은 비행기 간도호에 헌납하고 잔여는 도문 상공을 방비하기 위하여 고사포 자금으로 헌납하게 되었는바 헌금자의 방명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二百圓式 최호정, 김영찬, 유용구, 一百七十圓 현규환, 一百五十圓 동해상회, 一百圓 式 최석마, 박정화, 최진동, 전응칠, 송학수, 정세윤, 이규호, 정상익, 엄두영, 민흥식, 이호선, 七十圓式 김청선(이외 명단 생략)



3. 국방헌금 납부에 대한 소명


    1937년 11월2일자 동아일보에는 국방헌금 납부자 명단이 있고 그 중 100원을 납부한 명단에 최진동 장군 이름이 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국방헌금에 대한 압박은 거셌고 동아일보 기사에 “도문圖們 당지에서 8월 25일에 헌금취급위원을 선거하여 금일에 이르도록 취급한 전액은 4,000여원에 달한바”라고 언급되어 있듯이 실적을 올려야하는 ‘헌금취급원’들은 돈을 내지 않고는 연변지역사회에서 살 수 없을 정도로 협박을 하며 수금을 했다. 최진동 장군이 어떤 반사이익을 얻기 위해 일제에 국방헌금을 납부한 것은 아니다. 일제는 지주였던 최진동 장군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독립운동 관련 사건이 있으면 언제나 그 배후로 지목하거나 온갖 구실을 만들어 최진동 장군과 가족들을 경찰서로 연행해 가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날 때까지 고문을 하거나 감옥에 가두고 괴롭혔다. 이 국방헌금은 최진동 장군과 가족들에 대한 고문과 압박으로 당시 최진동 장군의 부인이 남편 몰래 납부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납부하였던 최진동 장군의 이름으로 국방헌금이 납부된 것은 사실이다. 국방헌금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와 후손들의 질문에 대해 공정한 답을 해줄 것을 요청한다.


        첫째, 만주국이 수립된 후 상해 등지와는 달리 국내 못지않은 식민지가 된 북간도에 생활터전을 가지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삶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2015년 9월 연변역사학회장 김춘선 교수는 최진동 장군의 국방헌금에 납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만약 100원의 국방헌금이 문제가 된다면 당시 같은 시대를 살았던 구춘선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도 다 친일이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만주국 시기였다는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는 잘못된 분석”이라고 확언했다.

        둘째, 독립운동가로 서훈된 사람들 중에는 최진동 장군뿐만 아니라 조병옥(독립장, 서훈’62년) 200원, 유기준(애족장, 서훈’90년) 50원, 최윤호(애족장, 서훈’91년) 50원, 신현모(애족장, 서훈’90년) 50원 등 국방헌금을 낸 이력을 가진 이들이 많다.32) 조병옥(독립장 62년), 최진동(독립장 63년)과 달리 보훈처는 1990년대 서훈을 할 때도 국방헌금을 문제로 보지 않고 서훈을 했다. 그런데 왜 지금 최진동 장군에게만 친일의 잣대가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보훈처주장 4. 항일무장대 귀순 공작하는 관동군 위촉 선무부장


    ④ 관동군 위촉 선무부장을 했다는 보훈처 제시자료

    ○ 관동군 위촉 선무부장 최진동씨 永逝, 東條首相으로 榮擧의 吊慰金(만선일보 1942. 1. 30) 관동군 위촉 선무부장 최진동씨는 지난 15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는데, 씨는 만주사변 당시엔 귀순공작에 진력하여 그 공적이 다대하였고, 또 작년 5월 관동군 선무반의 일에 위촉되어 토비 귀순에 활약 중 금번 별세한 것이다. 그 공적을 가상하여 東條首相으로부터 3,000원, 관동군사령관도 2,000원, 관동군 고급참모 200원의 조위금이 있었다.

    ○ 남편의 유언에 순종해 조위금을 육영사업에, 고 최진동씨 미망인 최씨 고 최진동씨의 생전의 공적을 가상하여 東條首相 관동군사령관으로부터 원 증여한 조위금을 미망인 최씨는 그 남편의 유언에 의하여 이것으로 전부 육영사업으로 도문국민고등학교에 1,000원, 백풍국민우급학교에 1,100원, 사립국민우급학교에 500원의 각각 기부를 하여 이 거룩한 행위에 □□□□□□□□ 되어 있다.



4. 만선일보 관동군 위촉 선무부장 기사 관련 소명


    위 내용은 친일기관지였던 만선일보33)가 최진동 장군 사후에 낸 선전용 기사다. 최진동 장군이 어떤 선무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서술도 전혀 없다. 만일 최진동 장군이 한번이라도 선무 활동을 했다면 일제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민중의 가슴속에 자주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었던 독립군 총사령관이 변절하여 선무활동을 한다고 그 내용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꺾는 선전 재료로 온갖 신문에 내고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무활동의 사례나 기사는 없고 단지 사후에 선무부장이라는 간판을 내세워 선전에 이용하고 최진동 장군을 폄훼했다. 


    일제가 최진동장군에게 선무부장 간판을 씌운 것은 1941년 6월경34)이었고 1941년 11월 최진동 장군이 사망 몇 개월 전으로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있을 때였다. 당시 일제는 도문에 있는 최진동 장군의 옆집에 3층 요정을 세우고 높은 곳에서 24시간 최진동 장군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을 모두 감시하였다. 일제는 최진동 장군을 변절자로 만들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꺾는 선전재료로 이용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괴롭혔다. 또한 최진동 장군이 산림 지역에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와 공작해서 땅을 뺏으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최진동 장군은 일제에 빌미를 주는 일을 피하고 자신의 명성과 재산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1941년 최진동 장군이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져 몸져누운 기회를 틈타 일제는 산림채벌권의 이권을 노리는 이기권을 사주해서 “형식적으로만 선무반 간판을 달고 일제의 괴롭힘을 피하라”고 최진동 장군의 부인을 설득하고 압박했다.35) 최진동 장군이 거의 의식이 없을 때 일제와 이기권이 결탁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일제가 최진동 장군의 집에 선무반 간판을 달았지만 최진동 장군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몇 달 만에 그대로 사망했고 일제와 이기권의 공작도 수포로 돌아갔다. 다만 최진동 장군 사후에 친일신문 만선일보 기사로 선전을 했을 뿐이다. 일제가 독립군 대장에게 선무부장이라는 선전용 허울을 씌웠던 것은 최진동 장군이 사망 직전까지 일제로부터 얼마나 많은 압박을 받고 괴롭힘을 당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보훈처가 조의금을 언급하지만 사후의 조의금야 말로 오히려 친일 조작의 근거로 설명될 수 있다. 더구나 그 조의금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최진동장군은 이와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재산을 독립운동에 투입했다. 아주 단순한 일례로 1920년 봉오동전투 직후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군의 상황을 보고한 공문서를 보면 “한당 수령 최희(崔熙)36)는 (중략) 자신의 토지와 가옥을 팔아 버리고 있다고 함. 그리고 초모정자 지방에서 중국인 1천5백 명을 모집하고 한국어를 아는 자들에게는 매월 1백원을 주고, 그 외에는 일금 6십원을 준다고 함. 그리고 한국어도 알고 한국문자도 아는 자에게는 일금 1백 5십원을 준다고 함. 현재 이미 육백여 명을 모집하고 일일이 등록한 후 비밀리에 강동의 한경(韓境) 내에 파견하여 일본놈을 공격한다고 함”37)이라고 적고 있다. 한국인 독립군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독립군으로 모집해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중국측 보고서다. 100원씩 1,500명이면 매월 150,000원, 1920년 6월에 이미 등록을 했다는 600명으로 계산해도 60,000원이다. 오랫동안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기를 조달한 것 외에 이 기록만으로도 조의금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돈이다. 


    최진동 장군은 친일을 할 어떤 동기도 없었으며 다만 일제의 가족과 동지들을 볼모로 하는 끊임없는 압박이 있었다. 그리고 만주지역 독립군에게 귀순과 선무반이라는 것은 적극적 친일행위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치하에서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압박과 박해는 거셌고 독립군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도 약해졌다. 독립군들의 일부는 중국군대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북간도 출신의 독립군들은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우리 독립군들은 산림에 숨어 농부로 위장해서 살았다. 발각되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기도 했지만 표면적으로 귀순을 하고 조용히 살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귀순이라는 것이 밀정과 같이 일제를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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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최진동에 대한 부가자료에 대한 소명


    그 외 보훈처가 친일 근거자료에 포함시켜서 보내온 자료는 2가지로 ‘연변4현 자치촉진회 성립사정’이라는 제목이 있는 『현대사자료』 제29권 627면과 보훈처가 중국에서 수집한 ‘최진동에 대한 회억자료’이다. 


    5-1. ‘연변4현자치촉진회 성립사정’이라는 제목이 있는 『현대사자료』 제29권 627면을 일본어 원문 그대로 복사해 보내왔다.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언급이 없어 이 자료를 보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30년 ‘연변4현자치 촉진회’ 성립과정에서 소집한 연변4현 유력 귀화 鮮人 20명 명단에 ‘최진동’이 들어있음을 문제 삼는다고 생각된다. ‘연변4현자치촉진회’ 는 아래에 인용된 운동방침38)에서 보듯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이었다.

        1)연변4현 자치촉진회 회원들을 민족주의자와 각개 종교단체의 골간으로 배양한다.

        2)각 분회, 각 지분에서는 목전에 힘을 다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타도하고 점차 자치를 촉진한다.

        3)공산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본회에서는 임시 유설대(游說隊)를 조직하여 각지에서 유설을 하여 일반 민중들이 공산주의 불합리성을 알게 하여 조선인의 민족대단결을 고조에 이르게 한다.

        4)공산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전단을 살포한다.


    최진동 장군은 연변지역 유력한 지도자였기에 ‘연변4현자치촉진회’ 외에도 1929년 홍진, 황학수, 이청천, 김좌진 등과 함께 ‘생육사’를 조직했고 1930년 생육사 총회에서는 한인들의 친목, 수양, 식상을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다는 사항을 결의했고 최진동 장군은 이장녕, 황학수 등과 함께 중앙집행간사이면서 동시에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39) 최진동 장군은 연변지역 지도자로서 한인들의 권익을 위한 자치운동과 자치단체의 활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연변 지역 지도자로서 여러 단체에 이름을 올린 것이 어떻게 친일행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보훈처의 설명을 요청한다.


    5-2. ‘최진동에 대하 회억자료’이다. 보훈처가 1986년 5월 중국에서 몇몇 노인들에게서 수집한 자료라고 표기되어 있다. 최진동 장군이 1941년 이기권과 결탁하여 선무반을 조직했고 일본의 내각대신을 만났고 200여명의 밀정을 가지고 유인활동을 하다 1941년 사망했으며 일제 관동군 사령부가 1만원의 장례비를 지급했다는 내용으로 위에서 기술한 만선일보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훨씬 과장되어 있다. 근거 없는 소문이기 때문이다. 


    1941년 최진동 장군의 장례식은 일본군의 통제 하에 진행되었다. 장례식에 최진동의 동지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했고 가까운 가족들 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군을 태운 트럭이 앞뒤로 붙었던 것이 마치 호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으나 그것은 철저한 감시 행위였다. 무엇보다 일제는 최진동 장군의 독립의기를 막기 위해 그의 관 뚜껑을 쇠로 만들어 덮었다. 장례식 행렬에 일본군 트럭이 동원된 것을 보고 마치 호화로운 장례식처럼 회자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불행한 장례식이었다. 


    문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은 반일 독립군 사령관으로 칭송받던 최진동 장군을 지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공산주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등 공산주의를 거부했던것이 큰 이유가 되었다. ‘공산주의를 반대한 사람’과 ‘지주’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타도의 대상이었다. 최진동 장군은 ‘공산주의를 반대한 지주’였다. 친척과 가족들이 최진동 장군을 친일지주로 만들어 부정하면서 공산당에 충성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지켰다. 중국 공산당의 핍박에 못 이겨 최진동 장군의 며느리가 최진동 장군을 친일이라고 인정하고 최진동 장군의 묘를 파묘하고 유골을 냇가에 버리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살아남기 위해 못 할 것이 없었던 때였다. 


    공산당에 의해 최진동 장군이 친일분자로 매도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연변지역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연변역사학자들도 오랫동안 그렇게 인식해 왔었다. 그리고 한국과 교류가 시작되고 연변 역사학자가 한국에서 최진동 장군은 친일을 역설하기도 했다. 당시 그 사실을 파악한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2005년경 최진동 장군의 소문에 대해 재심을 했고 그 결과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있었다. 당시 연변역사학계도 한국에서 보다 많은 독립운동자료들을 접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2006년 연변역사학회는 최진동장군 평전40)을 간행했다. 현재 연변역사학계는 최진동이 친일이 아니라 훌륭한 독립군 지도자였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6.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최진동 장군을 모른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최진동 장군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단 한 건도 없다. 현재 보훈처의 공훈록에 최진동 장군의 생몰연도조차 잘못 기재되어 있다. 공훈록에는 1882년 7월 17일 출생, 1945년 6월 18일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틀린 기록이 보훈처의 공식 기록으로 등재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최진동 장군의 실제 생몰연도는 1883년 7월 17일 출생, 1941년 11월 25일 사망이다. 국사편찬위가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최진동’ 혹은 ‘최명록’을 검색하면 ‘최명록’이 258건, ‘최진동’이 240건 관련 자료가 나온다. 대부분이 일제 외무성 자료이고 신문기사다. 대한민국의 무장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많은 양의 자료다. 최진동 장군의 행적을 의심하는 역사학자들이 북간도의 무장독립전쟁과 최진동 장군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 얼마나 확인하고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최진동 장군을 단죄하고 있는지 오히려 되묻고 싶다. 


    국가보훈처 서훈심사위원 모두가 독립운동사 전체를 공부하거나 전공한 것이 아니다. 서훈심사위원회의에서 관련 분야 전공자의 의견이나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피력하는 위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진동장군의 친일 논란에 대한 소명 자료를 제출하면서 차제에 보훈처의 서훈심사제도에 대해 강력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한 서훈심사위원이 서울신문에 최진동 장군의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다고 제보해서 신문기사로 사회적 논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논란을 근거로 1차 재조사에 포함시켰다. 신문기사는 또 하나의 증거 자료로 축적되었다. 결국 그 위원은 2020년 서훈심사위원회에서 최진동 장군의 서훈 취소 결정을 이끌어 냈다.


    국가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는 여러 불확실한 내용들을 근거로 온 일생을 동안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역사적 인물을 친일이라고 결정하려고 한다. 무장독립운동사 어디에서나 언급되는 독립군 지도자로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 관한 일제보고서도 여러 개 있으며, 중국과 일본 양쪽에서 견디기 힘든 압박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에 일생을 바친 독립군 사령관을 대한민국 보훈처가 친일로 규정하려고 하는 기막힌 현실이 눈앞에 있다.


    한 나라의 보훈행정은 국가의 유사시에 국민이 하게 될 선택을 결정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그동안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밝히고 기리는 일에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모든 입증 책임이 후손들에게 주어지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아직도 정설로 회자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보훈행정이 그동안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늠자다. 몇몇 유명한 영웅을 제외한 인물의 독립운동 업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못해 가혹한 정부의 행정행위에 대한 비판이 모자라지 않은 현실을 돌아보며 최진동 장군의 업적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명예훼손이라 불러 모자람이 없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사과를 촉구한다.




주석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보훈처가 보낸 서류에는 “최 부위(최진동)는 온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최 부위는 “元 陸軍副尉 崔齊剛”이라고 자료에도 나와 있고 원문에도 “崔副尉ハ穩城ニ歸リタリト”으로 기록되어 있어 “최 부위(최진동)”은 보훈처의 誤記로 위 인용문에서는 정정했다.

2)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9권 「暴徒ノ行動ニ關スル件」 秘受2043호 1911년 6월 12일

3) 韓國近代史資料集成 9권 「陸軍大佐齋藤季治郞北滿洲及露領浦鹽地方在住朝鮮人ノ狀態視察一件」 1911년 12월27일

4) 박청산, 『연번항일혁명사적지』, 연변인민출판사, 2002년 62쪽.

5) 『무장독립운동사』 p98 이강훈, 서문당, 1975.

6) 용연 김정규 『야사』, 1909년 음력10월25일, 1910년 음력7월2일, 7월3일 일기

7) 이성우, 「在滿 大韓光復團의 조직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4집 54쪽 ;유한철, 「十三道義軍의 設立過程과 組織上의 性格」, 22~25쪽

8)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七冊ノ內四, 「騷擾事件ニ關スル件」 1919년 4월6일.

9)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七冊ノ內五, 「地方騷擾ニ關スル件」 1919년 5월24일. 朝鮮總督府 內秘補1095

10) 일제가 잘못 인지한 첩보이다. 최진동 장군은 1923년이 아닌 1924년 9월 중국관헌에 체포되었다.

11) 「5개기관대표의 국민회에 대한 요구의 건」 5항 “계봉우·구춘선 국민회장 등이 도윤공서道尹公署에게 장서長書를 보내어 북간도 제단체가 독립을 자탁藉托하야 강도적 행위로 인민을 학대하는 것을 진압하여달라고 한 사실”

12) 일본외무성문서, 「崔振東을 發起人으로 한 不逞鮮人의 計劃에 關한 件」 (1924. 1.18)

13) 일본외무성문서, 「最近에 있어서 間島 및 接壤地方 不逞鮮人團의 狀況 等에 關한 件」(1924. 1.12)

14) 위의 자료.

15) 보훈처는 일본어원문을 최진동 장군에게 불리하게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동일한 일본어원문에 대해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공저의 『최진동장군』에서는 “일본 측으로부터 주모자로 지목되어 추적을 받으면서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로 해석했다.

16) 보훈처의 부정적 해석, 위의 책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중국에 귀화하고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생활하였지만 늘 조선의 독립 등을 염려하였다.”로 보훈처 해석과 반대로 해석했다.

17) 보훈처의 부정적 해석이다. 일본어원문에는 “겨냥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模樣으로 본 건은 당분간 신문지 등에 발표하지 말도록 함”으로 되어 있다.

18) 1924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 제목 ‘동양대의단원’

19) 1924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 제목 ‘최진동의 세력왕성’

20) 일본외무성문서, 1924년 1월 18일, 「奉直波ノ鮮人操縱說」

21) 1924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제목 ‘봉직풍운과 조선독립군 중국각처에 있는 독립군의 선후책’

22) 『敬天兒日錄』 김경천 장군 일기, 1924년 10월13일자

23) 일본외무성문서, 1924년 10월 29일, 「不逞鮮人 崔振東에 關한 件」

24) 일본외무성문서, 1925년 4월 30일, 「不逞鮮人 行動에 關한 件」

25) 일본외무성문서, 1926년 8월 26일, 「鮮匪首領 崔明祿 釋放說에 關한 件」

26) 『최진동장군』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공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p232

27) 일본외무성문서, 1926년 8월 26일 「鮮匪首領 崔明祿 釋放說에 關한 件」

28) 일본외무성문서, 1926년 9월 15일 「元督軍府 首領 崔明祿의 出獄後에 있어서 支那官憲의 態度에 關한 件」

29) 『최진동장군』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공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p230

30) 일제는 보훈처가 제시한 자료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模樣으로 본 건件은 당분간 신문지 등에 발표하지 말도록 함”이라고 적었는데 ‘모양模樣’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추정된다’라는 의미로, 만일 최진동 장군이 일제에 직접 귀순보고를 했다면 “두려워하고 있으므로”라고 적었을 것이다.

31) 위의 책, p232

32) 『독립운동 맞습니다』 정상규, 아틀리에BOOKS, 2019년

3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주에서 장춘의 『만몽일보』와 용정의 『간도일보』를 통합하여 1937년에 창간한 신문. 친일신문.”

34) 반민특위, 이기권 신문조서, 참고로 피의자였던 이기권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35) 이기권은 반민특위 조사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최진동 장군을 끌고 들어가 증언했지만 최진동 장군과 관련된 이기권의 증언은 사실이 아니다.

36) 최진동의 이명

37) 『중국조선족사료전집』 제20권, 연변인민출판사,2015, p504, 「한당 수령 최희의 반일동향과 관련하여 올린 보고서」

38) 강덕상 <현대사사료> 29, p628 ; 위의 책 p235~236.

39) 『최진동장군』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공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 『대한독립운동항일투쟁총사』 p936~937

40) 『최진동장군』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공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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