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바로알기

최운산 장군 바로알기

최운산 장군(1885~1945)
異名: 만익(萬益), 문무(文武), 고려(高麗), 명길(明吉), 풍(), 빈(), 복()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은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사의 숨은 영웅이다. 봉오동을 위시한 도문, 석현, 서대파, 십리평, 양수천자 등 10여개 지방을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러시아군에 소와 곡물을 대량으로 수출한 무역업자로 연해주 독립군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콩기름공장, 제면공장, 양조장, 두병공장, 성년공장, 비누공장을 비롯한 여러 생필품공장을 운영한 기업가였다. 북간도 왕청현 소재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하고 동포들을 불러들인 최운산은 자신의 마을 봉오동을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1912년 중국 장작림 군에서 뽑아온 군인들과 독립군이 되기 위해 봉오동으로 모여온 애국청년들을 결집해 독자적으로 독립군부대를 조직하고 <봉오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훈련과 민족정신을 함양하며 장기간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운산이 운영하던 670명 규모의 휘하 사병부대 <도독부>를 모체로 형제들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군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사령관 최진동)를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최운산은 식량, 무기, 군자금을 모두 지원하여 자신의 소유지 왕청현 서대파에 <북로군정서>(총재 서일)를,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소장 김좌진)를 창설했고,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을 선포한 1920년에는 북간도의 모든 독립군 단체를 통합해 <대한북로독군부>(사령관 최진동)를 창설했다. 봉오동의 대한군무도독부는 36차례 이상의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며 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독립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 정규 군대를 격파한 봉오동과 청산리의 독립전쟁은 최운산 장군이 오랜 기간 노력하고 준비한 결실이었으며,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민족자결의 빛나는 표상이었다.

최운산 장군은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라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전투 등 여러 무장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렇게 한일병탄 이후 바로 무장독립군부대를 창설해 훈련 양성하며 지속적으로 확대시킨 최운산의 노력이 한국독립군의 3대 대첩 모두의 승리에 밑거름이 되었다. 1920년 1월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에 매각해 체코군단의 무기를 산 것을 비롯해 자신의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쏟아 부은 최운산의 자금력과 러시아 네트워크 덕분에 러시아군과 체코군에서 신식 무기를 사들일 수 있었고 완전무장한 독립군 통합군단이 일본군대를 대파할 수 있었다. 1910~1940년 당시 간도 지역에서 최운산 장군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은 독립운동단체나 애국지사가 거의 없었다.

3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무장투쟁을 지원하고 대규모 무장독립군을 유지하느라 모든 재산을 소진한 탓에 해방 당시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 장군에게 남은 것은 봉오동 수남촌의 집 한 채뿐이었다. 평생 여섯 차례의 옥고와 모진 고문을 치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에 평생을 바쳤던 최운산 장군은 시대를 뛰어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